오랜만이야! 개인적인 일 때문에 너무 오랜만에 편지를 쓰네. 기다렸지? (그렇다고 해)
사과의 의미로 내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얘기를 해볼게.
나는 고3 수능 때 피똥을 쌌어. 진짜 제대로 망쳤어. 그래서 사실 고3 수능에 대해서는 얘기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정말 싫어해. 심지어 기억에서 애써 잊으려고 할 정도지.
하지만 내가 인생의 소중한 교훈을 얻은 경험이기도 해서, 오늘 편지에서 한번 소개해볼게. 조금 길지만, 충분히 위로와 공감이 될 이야기야.
국밥마냥 시원하게 말아먹다
내 지난 1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처음 직감한 건 2교시 수리 영역이었어. (그래 라떼는 수학 영역이 아니라 수리 영역이었단다)
굳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원래 나는 문과적인 소양이 강한 학생이었어. 지금도 나를 처음 보거나 애매하게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내가 문과일 거라고 생각하더라구.
아마 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반대로 나는 수학에서는 늘 애를 먹었어. 그런데 그런 놈이.. 고등학교에서 어떤 계기로 인해 이과를 선택해서 아주 힘든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어. 어떤 계기인지는 나중에 알려줄게.
어쨌든, 평소에도 수학을 어려워했는데 고3 수능 수리 영역 시간에는 '아 진짜 ㅈ됐다’라는 생각이 수십 번은 떠올랐어. 식은땀이 뻘뻘 나는데 문제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그렇게 수능에서 가장 중요한 멘탈 관리에 실패한 채 수리 영역이 끝났어.
다행히 나는 영어는 잘하는 편이라 3교시는 편안하게 넘겼지만, 곧바로 2차 고비가 찾아와. 이미 무너진 멘탈을 회복하기에 3교시 하나로는 부족했던 걸까? 과학탐구 영역도 제대로 망치고 내 10대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를 허망하게 마무리했어.
수능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어머니가 시험장 앞으로 마중 나와 있었지만, 나는 못 본 척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어.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싶었거든.
나는 모두가 사교육에 미쳐있는 소위 ‘강남 8학군’에 살았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우리 부모님은 그 정도로 심한 교육열을 가진 분들은 아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을 국밥마냥 시원하게 말아먹은 충격은 정말 컸어.
인생은 퍼즐조각
아마 수능을 본 당일 밤이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가 나한테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어. 이건 내가 삶에서 늘 지니고 있는 태도 중 하나로 자리잡아 있기도 한데, 바로 인생지사 새옹지마야.
지금 당장 힘든 일이 닥쳤을 수도 있고, 반대로 정말 기쁜 일이 있을 수도 있어. 그런데 당시에는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만 인식되는 그 일이, 내 미래에 어떤 또다른 사건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지금은 뛸듯이 기쁜 일이 얼마 뒤 나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어. 반대로 지금 겪는 고난이 결과적으로 나에겐 더 좋은 열매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순간에 우리는 그 일이 나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지 못해. 그래서 순간의 느낌으로 반응할 뿐이지.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우리는 곧 뒤를 돌아보며 그 일을 평가할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 평가는 내가 살고있는 현재의 상황에 따라 바뀔 거야. 즉, '그때 그 일이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영향을 미치는구나'를 계속해서 깨닫게 되겠지?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인생이 퍼즐 조각이라고 했어. 조각 하나만 보고서는 최종적으로 그려질 전체 그림을 예측하기 어렵지. 그런데 하나씩, 여기저기서 맞추다 보면 ‘아, 이 조각이 그림의 이 부분을 채우기 위한 거였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수능을 망쳤지만 그로 인해 재수를 하고, 재수를 하며 그 어느 때보다 내 인생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가치관이나 삶의 태도를 썩 좋아하는데, 이 중 대부분은 재수를 하며 형성됐어. (힘든 만큼 고민이 깊어지기 때문..)
내가 내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성찰하고 고민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재수 생활이었어.
또, 재수를 하고 내가 졸업한 우리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야. 내가 했던 학교 생활이 발판이 되어 쌓아가고 있는 지금의 커리어도 얻지 못했을 수 있고. 아무튼 내 인생이 지금과는 꽤 많이 달랐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장을 늘 마음에 새긴 채 살아. 일희일비 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거지. 이 교훈을 얻었기 때문에, 고3 수능이 나에게는 만질 때마다 아픈 상처인 동시에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밑거름이야.
긴 이야기였다! 에게 조금이라도 위로 또는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네.
넌 어때? 안 좋은 일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던 경험이 있어? 아니면 그 반대는?
P.S. 아 그리고, 앞으로는 레터를 더 자주 써볼게! 짧고 가벼운 레터라도 괜찮겠지?